
경기도 양평,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대자연 속에서 30여 년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가 있다. 지난 50년간 ‘존재(Natural Being)’라는 화두를 붙들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천착해 온 김근중 작가다.
그는 고구려 벽화와 둔황 벽화 연구를 시작으로, 현재는 석고 붕대와 돌가루, 천연 안료를 층층이 쌓아 올린 독창적인 단색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조형적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다. 그 안에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희로애락, 그리고 치유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배우고, 그 깨달음을 화폭에 옮기는 김근중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Q.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작가 김근중입니다. 저는 지난 50년간 ‘Natural Being(존재)’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재료와 방법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양평으로 작업실을 옮겨 30여 년간 거주하면서 매년 변화하는 대자연의 풍경과 그 안의 생명체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존재(Natural Being)’라는 주제가 작가님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에게 존재란 무엇인가요?
A.저에게 존재란 우주 만물 그 자체입니다. 날아가는 새, 바람, 빛, 그리고 우리 인간까지 모든 것이 존재지요. 자연을 관찰해 보면 그들의 존재 방식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 날씨가 맑았다가 폭풍우가 치는 것, 이 모든 것이 꾸밈없고 인위적이지 않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배제하려는 분별심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대자연처럼 기쁨과 슬픔, 따뜻함과 추위 같은 상대적인 것들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제가 말하는 ‘Natural Being’의 핵심입니다.
Q. 꾸준히 드로잉 작업을 병행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로잉이 실제 작품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A.드로잉의 가장 큰 미덕은 ‘무목적성’입니다. 어떤 전제나 계산 없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의도하고 그리면 자연스러운 선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주제만 던져놓고 그릴 때 비로소 작가의 본래 모습과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납니다. 이렇게 드로잉을 통해 얻은 생동감과 자연스러운 순수함을 실제 캔버스 작업으로 연결하여, 작품에서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드로잉을 꾸준히 하는 이유입니다.
Q. 석고 붕대, 돌가루, 펄(Pearl) 등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재료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A.젊은 시절 벽화를 연구하며 흙벽의 질감에 매료되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캔버스 위에 돌가루를 대여섯 차례 발라 벽화와 같은 단단한 표면을 만들고, 그 위에 천연 안료를 수없이 쌓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물을 뿌리고 수세미로 갈아내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합니다.
이 과정은 대자연의 존재들이 살아가며 남긴 삶의 흔적과 시간을 축적하는 행위입니다. 겹겹이 쌓인 색을 갈아낼 때 밑색이 배어 나오며 삶 전체를 통찰하는 깊이가 생기죠. 특히 석고 붕대는 부러진 뼈를 고정하듯, 살아가며 겪는 인간의 좌절과 고통, 상처를 위로하고 보듬어준다는 제의적(祭儀的)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기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기 위해 펄(Pearl)을 사용하여 깊이감과 경쾌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Q. 작가님의 단색화는 기존의 서구 미니멀리즘이나 한국의 단색화와 어떤 차별점이 있나요?
A.서양의 미니멀리즘 기반 단색화는 이성(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욕망과 감정을 배제하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반면, 저의 작업은 동양의 ‘불이(不二)’ 사상, 즉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욕망과 감정, 그리고 본질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동양 사상, 특히 만물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귀장역(歸藏易)’의 원리처럼, 제 작품은 삶의 희로애락과 모든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 포용하고 통합하여 압축해낸 결과물입니다.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단색화의 가장 큰 차별점입니다.
Q.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공공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공공미술관 속 작품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공공미술관은 대중들이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러 오는 곳입니다. 소장된 작품은 독창성과 분명한 정체성, 그리고 메시지를 통해 관람객들의 닫힌 사고를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작가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여 ‘자기 완성’을 위한 작업을 해야 합니다. 작가가 치열하게 자신을 완성해 나간 흔적이 담긴 작품만이 관람객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고, 그들 또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Q. 대중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A.유명한 작가나 돈을 많이 번 작가보다는, "저 작가는 정말 치열하게 살다 갔구나"라고 기억되고 싶습니다. 제 안에 남은 모든 열정과 땀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붓고, 작가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완주했던 사람. 자기 완성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다 간 작가로 남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